한민족사

신미 스님

조선선인 2015. 6. 29. 11:56

 

수양대군 시절부터 깊은 인연
자존심 셌지만 신미에겐 깍듯
세종 때 석보상절 같이 편찬
수양대군 왕위에 오른 뒤에도 신미를 스승으로 모시며 공경
복천사 등 직접 찾아가기도
신미도 세조 위해 상원사 중창

“순행(巡行) 후 서로 있는 곳이 멀어지니 직접 목소리를 듣고 인사드리는 일도 이제 아득해졌습니다. 나라에 일이 많고 번거로움도 많다보니 제 몸의 조화가 깨지고 일도 늦어집니다. 그렇다고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항상 부처님께 기도를 해주시고 사람을 보내어 자주 안부를 물어주시니 다만 황감할 뿐입니다. 행여 이로 인해 제가 멀리서 수행에 전념하고 계신 스님에게 폐를 끼치고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습니다. 원각사의 일은 널리 들으신 바와 같고 끝까지 서술하기는 곤란합니다. 저의 지극한 정성에 부흥해 스스로 편안하게 머무르시기를 바라옵니다. 금을 보내드리오니 좋은 곳에 쓰시기를 바라며, 불개(佛盖)와 전액(殿額) 그리고 향촉 등 물건을 아울러 받들어 올립니다. 조선국왕”

 

▲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과 신미가 주도해 만든 석보상절.

1464년(세조 10년) 여름, 신미(信眉, 1403?~1480?)는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 상주하고 있었다. 구름처럼 물처럼 떠돈다는 운수납자(雲水衲子). 신미는 자신을 스승으로 여기며 의지하는 세조(世祖, 1417~1468)의 언해사업을 돕기 위해 한양에 수년 씩 머물렀다. 퇴락한 사찰의 복원을 위해 멀리 떠날 때도 적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환갑을 넘긴 신미에게 먼 길이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복천사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소중했다.

신미에게 복천사는 각별했다. 이곳이 자신이 출가한 속리산 내 사찰이라는 점 때문은 아니었다. 수양대군 때부터 가까웠던 세조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직접 순행(巡幸)한 사찰이었으며, 그보다 앞서 성군(聖君) 세종(世宗, 1397~1450)이 이곳을 원찰로 삼겠다며 중건을 당부해 손수 지은 사찰이었다.


세종이 없었다면 세조와의 만남도, 불경 언해도 있을 수 없었다. 신미가 세종의 은혜를 되새기며 승하한 뒤에도 매일 축원을 올렸던 것은 그 때문이다. 세종은 세조와는 달리 집권 초기 강력한 불교 탄압 정책을 폈다. 불교 종파를 7개에서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지시켰다. 허나 그것은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 국왕으로서의 역할이었음을 신미는 잘 알았다. 오히려 세종 개인은 불교에 퍽 호의적이었다. 초기부터 왕실불사를 지원하는가 하면 직접 사찰의 보수나 설립을 주도했다. 나중에는 무주고혼을 위로하는 수륙재를 거행하고 궁궐에 법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세종이 신하들과 자주 다퉜던 이유도 주로 불교 때문이었다. 그들은 세종의 숭불을 두고 끊임없이 간(諫)하고 상소를 올렸다. 그럴 때면 세종은 “승려들도 나의 백성이다” “한·당 이래 역대 임금들이 부처를 섬기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나도 섬긴다”고 맞섰다. 한번은 집요하게 공격하는 신하들을 향해 “나는 간함을 거절한 임금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세 번 간해서 듣지 않으면 벼슬을 버리고 간다 했는데 그대들은 어찌 가지 않는가”라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이런 세종에게 자식과 왕후의 죽음은 그를 더욱 돈독한 호불군주로 만들었다. 1446년(세종 28년) 20살 광평대군이 부스럼병인 창진(瘡疹)으로 세상을 떠나더니 다음해에는 19살 평원대군이 홍역으로 요절했다. 다시 1년 뒤 그토록 사랑하는 소헌왕후마저 52살로 수양대군 사저에서 승하했다. 세종의 슬픔은 극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꿈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았다. 그는 다른 아들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도움을 얻어 궁궐 안에 불전, 승당, 선당, 등 총 26칸 규모의 내불당을 지었다. 신하들의 거센 저항도 세종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세종은 ‘불정심다라니경’을 사경하도록 해 2,000여명의 승려들이 참여하는 큰 법회를 열어 독송하도록 했다. 그는 더 이상 숭불군주임을 숨기지 않았다.


세종은 불심 깊은 형 효령대군, 그리고 아들 수양과 안평대군으로 인해 몇몇 고승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그 중 신미에 대한 신뢰는 유별났다. 세종이 신미를 안 것은 뒤늦은 일이었다. 세종이 만년에 불교에 대한 관심이 깊어질 무렵 신미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불경은 물론 사서삼경에 두루 밝으며 범어와 티베트어에도 능통한 학승이라고 했다. 또 밤을 새워 예불을 드릴 정도로 신심이 지극하고,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했다. 누군가는 그와 대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여서 ‘웅문거필(雄文巨筆)’의 문장가라고 불린다고도 했다. 무엇보다 신미가 세종의 마음을 끈 것은 자신이 아끼는 집현전 출신의 학자 김수온(1409~1481)의 친형이라는 점이었다. 김수온은 시와 서에 능했고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리는 문장가였다. 세종은 김수온으로부터 신미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 탁월한 불교지식과 언어능력, 그리고 고결한 인품을 바탕으로 기울어져 가는 불교를 일으키고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하려 애썼던 신미의 진영.

신미영동지방 양반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숭록대부를 지냈으며 외조부도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고위관료였다. 어릴 때 조부에게 한학을 배운 그는 10대 후반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하면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해 관직을 맡고 있던 부친 김훈이 불충불효 죄목으로 탄핵을 받는 사건이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무예에도 뛰어났던 그가 이종무를 따라 대마도를 정벌하는 공을 세웠지만 죄인의 몸으로 출정했다고 하여 오히려 재산을 몰수당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신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임금에게 글을 써 유배된 김훈을 고향 영동으로 모셔올 수 있었지만 그의 번민은 깊어져갔다. 부친으로 인해 성균관 유생들이 수군거렸고 관직에도 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불심 깊은 집안에서 성장한 신미는 20살 무렵 고향에서 가까운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했다. 그곳에서 신미는 출세간의 도를 닦았다. 경전과 계율을 부지런히 익혔으며, 일생의 도반인 수미(守眉)도 만났다. 20여년이 흘렀을 때 신미는 경·율·론 삼학에 두루 능통한 최고의 학승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세종은 산중에 머무르는 신미를 궁궐로 불렀다. 세종은 신미를 반갑게 맞이해 자리를 내어주고 담소를 나눴다. 신미의 말은 고요했지만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고, 이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더욱이 백성에 대한 신미의 애틋함이 어느 충신 못지않았다. 세종은 깊이 감동했다. 세종은 백성들이 누구나 글을 읽고 쓰기를 바랐고, 일반 백성에게 널리 퍼진 불경을 우리의 글로 옮겨 배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일이 사대부가 정치의 중심이 되는 성리학적 세계를 넘어 왕의 권위를 높여 정치를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 확신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첫 사업으로 조선건국의 당위성을 천명하는 ‘용비어천가’와 불교 연원을 밝힌 ‘월인석보(月印釋譜)’를 함께 편찬한 것도 왕실의 권위를 세우려는 의도에서였다.


신미로서도 불경 번역은 반가운 일이었다. 불교가 해동에 전래된 지 1,000년이 넘었지만 백성들은 미신과 기복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문을 익히지 못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읽는 일이 불가능했던 탓이다. 따라서 불경 언해는 불교를 신앙적인 측면뿐 아니라 사상적으로 민간에 깊이 뿌리내리는 일이었다. 신미에게 번역은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이자 강력한 불교 대중화운동이었다.


세종은 신미를 아꼈다. 불교 관련 일이 있을 때면 신미와 반드시 상의하도록 명했다. 신미도 세종의 기대에 부응해 찬불가시(讚佛歌詩)를 지어 올리는가 하면, 1447년에는 석가모니 일대기를 한글로 엮으라는 세종의 명을 받은 수양대군을 도와 ‘석보상절(釋譜詳節)’ 24권의 간행을 주도했다.


1450년 세종의 병이 깊어졌다. 신미의 지극한 기도로 잠시 차도는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때 세종은 신미를 침실로 불러 예를 다해 모시고 법사(法事)를 베풀었다. 세종은 신미가 곁에 있기를 바랐다. 신미를 효령대군의 집에 머물도록 하고 자주 불러 법문을 청했다. 세종에게 신미는 피안으로 건네주는 든든한 배였다. 세종은 유언을 통해 신미에게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릴 것을 문종에게 신신 당부했다. 세종이 승하한 뒤 신미는 오랫동안 복천사를 떠나지 않았다. 세종이 내리라는 법호는 대신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존자’가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덕이 있는 승려에게 내리는 칭호이고, 더구나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는 문구를 포함시킬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문종이 대신들의 상소에 굴복해 ‘우국이세’와 ‘존자’의 칭호를 뺀 ‘혜각종사’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신미에게 법호는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존자든 종사든 자신은 그저 신미일 따름이었다. 오히려 그를 안타깝게 한 것은 선왕이 떠난 지 오래지 않았음에도 왕의 권위가 급격히 실추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신미는 복천사에서 후학 지도에 전념했다. 세간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이 되지 않아 승하하고, 단종이 왕위를 이었다. 얼마 뒤 명에서 돌아온 수양대군이 계유정난(1453년)을 일으켜 김종서·황보인 등 대신을 죽이더니,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다. 한양에는 피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여러 유신(儒臣)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조카 단종까지도 결국 세조의 손에 무참히 죽어갔다.

▲ 세조의 모습을 그린 합천해인사존상도.

신미는 세조를 잘 알았다. 그는 괄괄했지만 불심이 깊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불교가 유교보다 나은 것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던 세조는 신미를 무척 존경했다. 누구보다 자존심 강한 그였지만 신미를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절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세종이 그에게 직접 ‘석보상절’ 편찬을 부탁할 정도로 세조의 학문적인 기반과 안목이 탄탄했다. 이런 그가 처음부터 왕이 됐더라면, 아니 문종이 병약하지 않았더라면 골육상잔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게 신미의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세조가 자신의 야욕을 위해 피의 길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미는 세조가 국가와 왕권을 일으켜 세우려 스스로 지옥을 짊어졌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더라도 수미산 같은 업보를 세조인들 피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미는 그런 세조를 위해 기도하고 세조가 꿈꾸는 세상을 위해 힘이 되겠노라 다짐했다. 그것이 곧 불보살님들과 뭇 백성들을 위한 길이라 여겼다.


1457년(세조 3년), 신미는 해인사 대장경 인출(印出)의 책임을 맡아달라는 세조의 부탁을 받고 해인사로 내려갔다. 신미는 대장경 50부를 성공적으로 인출한 뒤 세조의 불경 조성과 국역에도 적극 뛰어들었다. 세종 때 만들어진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편하는 ‘월인석보’ 작업을 주도했다. 신미는 두 내용을 합치는 차원을 넘어 본문 내용의 정정과 보완, 주해의 대폭적인 추가 등으로 완성도를 크게 높였다. 또 1461년(세조 7년) 6월, 불전 국역과 간행을 전담하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이 설립된 뒤에는 ‘원각경’을 비롯해 ‘능엄경언해’ ‘법화경언해’ ‘목우자수심결언해’ ‘몽산화상법어약론억해’ 등을 직접 국역하거나 교정에 힘썼다. 세조는 이제 신미가 없는 불사를 생각할 수 없었다. 신미는 그런 세조 곁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언해하는 틈틈이 왕을 위해 법문을 설했다. 신미가 복천사로 돌아온 것은 선수행의 요체를 밝힌 ‘선종영가집’ 작업을 마친 1463년 11월이 다 되어서였다.


세조는 자신의 형제들이 그랬듯 부스럼병이 심했다. 1464년 2월 세조는 온양 온천을 다녀오겠다는 이유로 순행(巡幸)에 나섰지만 속내는 복천사에 가는 데 있었다. 세종은 중궁과 세자, 여러 신료들을 대동했다. 세조에게 복천사는 부왕 세종의 서원이 깃들어있는 곳이었지만 동시에 스승 신미가 상주하는 사찰이기도 했다. 세조는 광주(廣州), 죽산, 진천, 청주, 회인을 거쳐 보은 복천사에 이르렀다. 그는 곤룡포를 차려입고 법당에 들어가 헌향하고 삼보에 공양했다. 그런 뒤 신미와 그의 제자들인 학열(學悅, ?~1482), 학조(學祖, 1432~1514?) 등과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눴다. 세조와 신미는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과 불도를 널리 펴 인천(人天)을 깨닫게 하자고 서원했다. 세조는 쌀과 토지를 복천사에 하사한 뒤 온양에는 들르지 않고 곧바로 궁으로 돌아왔다.


세조가 신미에게 편지를 보낸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진다는 소식과 신미의 기도에 깊이 감사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어 자신도 신미를 위해 지극한 정성을 기울이고 있음을 전했다. 신미는 세조가 순행에 이어 큰 불사를 추진하려 하고 있음을 알았다. 바로 원각사(圓覺寺) 중건이었다. 효령대군이 회암사 동쪽언덕에 석종을 세우고 ‘원각경’을 강의하자 여래와 분신사리가 나타나는 등 상서로운 일이 벌어진 직후였다. 세조는 그 옛날 신라 선덕여왕과 고려 왕건이 탑을 세워 왕의 권위를 높이려 했음을 알고 있었다. 원각사는 ‘불도를 널리 펴고 인천을 깨닫게 하겠다’는 다짐에서 비롯됐지만 명분과 정통성이 약한 자신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있었다.


세조는 옛 흥복사지 주변 인가 200여 채를 철거하는 데 시가의 3배를 지불하는 등 원각사 건립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원각사에 행차해 효령대군과 함께 직접 일을 감독, 지시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음해인 1465년(세조 11년) 4월 원각사가 낙성됐다. 세조는 신미를 비롯한 승려 128명과 대신들을 모두 초청했다. 낙성을 축하하는 경찬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후 세조는 다시 4만근의 동을 사용해 원각사 종을 조성했으며,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총동원해 원각사 10층탑 건립 불사도 추진해나갔다.


세조는 어느 왕보다 당당했지만 내심 자책감에 시달렸다.

형제와 조카들, 숱한 신하들의 목숨을 빼앗고 왕위에 오른 탓이었다. 게다가 부스럼증은 세조를 수시로 괴롭혔다. 이런 세조를 곁에서 지켜보던 정희왕후가 신미에게 세조의 치병 기도처를 부탁했다. 순간 신미는 오대산 상원사를 떠올렸다. 천하에 이름난 길지이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고 알려진 성지였다. 신미는 병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수백리 떨어진 오대산을 향했다. 그는 자신의 남은 생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면 기꺼이 세조에게 모두 주고 싶었다. 세조가 겪는 병고도 자신이 대신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었다. 그렇기에 신미는 더더욱 부처님께 세조의 쾌유를 빌며 간절히 기도했다. 신미는 자신의 옷과 발우를 불사기금으로 모두 내놓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권선을 시작했다. 제자인 학열과 학조도 적극 동참했다.

▲ 세조는 다른 형제들처럼 부스럼병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에서 나온 피고름 묻은 세조의 옷.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세조는 크게 감동해 눈물을 흘렀다. 신미의 정성이 지극한 자비심에서 우러난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세조는 상원사 불사에 적극 참여하리라 다짐했다. 쌀, 직물, 철 등 절을 짓는 데 필요한 물자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부스럼병으로 피고름이 묻어있는 어의도 문수보살에게 기도하는 심정으로 상원사로 보냈다. 특히 세조는 친히 오대산 상원사 중창 권선문을 작성했다. 훈민정음으로 쓴 최초의 권선문이었다. 세조는 신미에 대한 깊은 감사와 존경의 뜻을 표현하며 직접 수결(手決)을 썼다. 왕비와 세자, 공주, 원로대신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를 비롯해 8도의 수령방백과 장수 등 230명에 달하는 신료들이 세조와 마찬가지로 직접 이름을 썼다.

“…내가 왕이 되기 전부터 혜각존자를 일찍이 알았다. 서로 만나 도가 맞으니 마음이 화(和)하고 매번 바른 길로 이끌고 항상 깨끗한 생각을 갖게 함으로써 욕망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였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이 어찌 대사의 공이 아니리요. 여러 겁의 오랜 인연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 같을 수 있으리오.…”

세조의 하사품과 권선문을 받은 신미도 학열, 학조 등과 함께 상원사 중창을 권유하는 글을 써내려갔다.
“우리 성상(聖上, 세조)께서 크게 천명을 받으셔 동녘 나라를 다시 만드셨습니다. 억조 백성을 다스려 편안케 하시니 어느 중생과 승려인들 보답할 뜻이 없겠으리오만 오직 산 같이 은혜가 무겁고 힘은 터럭만큼 적을 따름입니다. …널리 바라는 것은 모든 어진 시주와 보고 듣는 이들이 모두 기뻐하며 보리심을 내어 덕의 근원으로 삼게 하려합니다. 위로는 끝없는 성상의 만수무강을 빌고 아래로는 큰 복을 억만세(億萬歲)에 비치게 하여 복리(福利)가 끝이 없이 현재와 미래에 다 이익(利益)이 될 것입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상원사 중창불사가 시작됐고 불과 1년여 만에 회향할 수 있었다. 이토록 불사가 빨리 진행될 수 있었던 데에는 신미의 정성과 세조의 적극적인 지원의 힘이 컸다. 1466년 3월 세조는 상원사 중창 낙성에 맞춰 1달이 넘는 긴 순행에 나섰다. 왕세자와 왕족들, 영의정 신숙주와 상당군 한명회 등 조정의 핵심 인물들이 대거 동참했다. 임금의 대대적인 행차에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세조는 금강산에 들른 다음 낙산사를 거쳐 상원사로 향했다. 금강산에서는 부처님이 빛을 내고 보살이 나타나는 등 상서로운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세조는 지역민들을 위무하는 등 민심대장정을 거쳐 상원사에 접어들었다.

세조는 상원사 법당에 참배하고 큰 불사를 끝마친 신미 등에게 감사를 표했다. 또 상원사 중창식에 참석해 지역 선비들을 대상으로 과거시험을 여는 이벤트도 실시했다. 세조가 목욕하는 도중 문수동자를 만나 질병을 치료했다고 전해주는 전설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순행으로 백성들의 불심을 한껏 북돋운 세조는 한양으로 돌아가 백관들의 축수를 받는 것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조선 최고의 숭불군주 세조는 두해 뒤인 1468년 9월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마지막까지 불경 언해 등 불사를 멈추지 않았다. 신미는 이런 세조를 위해 빈전(殯殿)에서 마지막 법석을 열었다. 신미는 허탈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 신미는 예종과 성종대를 거치며 다시 거세지는 억불정책 속에서도 꾸준히 불사를 진행했다.

 

▲ 훈민정음 보급의 일등공신 신미는 범자(梵字)와 티베트어에도 능통했다(왼쪽). 그러나 유학자들의 질시로 신미가 국역한 경전마저 나중에는 삭제되는 비운을 맞는다. 초판본(가운데). 초판본에 들어있던 신미의 법호가 재판본에는 빠져있다.

신미는 세간에서 자신이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했다는 얘기들이 있음을 잘 알았다. 집현전 실무담당자인 부제학 최만리조차 모를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된 엄청난 비밀사업. ‘석보상절’이라는 24권의 방대한 불경을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한문본과 언해본까지 완성한 것을 두고 반포 이전부터 승려들이 대거 참여한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또 글자의 생김새가 인도 불경 언어인 범어와 비슷하다보니 그것에 착안해 만들었다거나, 혹은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한자 옆에 점과 선, 글자를 새겨 넣어 발음이나 해석을 알려주는 불경의 각필부호와 유사하다는 얘기들도 했다.

누군가는 훈민정음 문헌에 불교에서 신성하게 여기는 ‘108’과 관련된 숫자들이 숨겨져 있는 것을 찾아내 신미가 주도했음을 추정하기도 했다. 그들은 ‘나랏말ㅆ·미듕귁에달아…’로 시작하는 한글 어지(御旨)가 108자로, ‘國之語音異乎中國…’으로 시작되는 한문 어지가 108의 꼭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위해 ‘더부러’ 등 4글자 이상을 고의적으로 탈락시켰다는 것이다. 또 한문 어지(御旨)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종결어미 ‘而己矣’를 사용하지 않고 ‘耳’를 사용하고 있는 등 글자 수를 맞추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담겨 있다고 분석하는 이들도 있었다. 게다가 108글자의 어지가 실린 ‘월인석보’ 제1권의 장수(張數)도 108쪽으로 다른 권들과는 달리 일련의 이야기를 중간에 잘라 별도의 권으로 만들면서까지 쪽수를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훈민정음’(국보 70호)의 경우도 불교적인 우주관을 상징하려는 듯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등 신미가 새로운 문자를 만들면서 불교를 포교하려는 목적으로 이 사업을 진행했다는 견해들도 있었다. 특히 그들은 훈민정음을 이용해 쓰여진 문헌 대부분이 불교와 관련된 것이고 유교 관련 서적은 거의 없다는 점을 그 증거들로 내세우기도 했다.

뛰어난 어학 능력과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고결한 인품을 바탕으로 기울어져 가는 불교를 일으켜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하려 애썼던 신미. 하지만 그는 훈민정음 창제와 언해본 발간이 결코 자신의 공헌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세종과 세조가 없었다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거니와 자신을 드러낼수록 훈민정음에 대한 유신들의 탄압과 저항이 커질 것이 분명했다. 신미가 후세에 그 흔한 법어나, 시, 글 한편 남기지 않고 너무도 적막한 생애를 스스로 걸어갔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억불숭유의 시대, 자신의 공덕을 숨기고 한없이 낮춤으로써 우리 민족의 언어를 대중화하는 대불사를 일궈냈던 신미. 그는 예종과 성종대의 억불정책 속에서도 꾸준히 불사를 진행하다가 1480년 무렵 복천사에서 적멸에 들었다. 이 편지는 1970년대 처음 발견돼 이호영 단국대 교수에 의해 학계에 소개됐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 ‘훈민정음의 길-혜각존자 신미 평전’(박해진 저, 나녹), ‘승 신미에 대하여’(이호영, 단국대 논문집 제10집), ‘속리산 복천암과 신미대사’(민덕식, 충북사학 제21집), ‘혜각존자 신미의 가계와 생애’(민덕시, 충북사학 제24집), ‘월인석보 편찬의 불교사적 의의’(최병헌, 진단학보 75), ‘상원사 중창 권선문의 조성 경위에 대한 연구’(김무봉, 불교학연구 제30호), ‘한글 창제의 배경과 불교와의 관계’(강신항, 불교문화연구 제3집), ‘세종의 언어정책사업과 그 은밀주의적 태도에 대하여’(하성 이선근박사 고희기념논문집 한국학논총), ‘한글창제와 불교신앙’(김광해, 불교문화연구 제3집), ‘세종의 불교신앙과 훈민정음 창제’(김종명, 동양정치사상사 제6권 1호),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신미의 역할’(이재형, 불교문화연구 제4집)

[출처] 신미스님|작성자 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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