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사

동이조상 치우(蚩尤)와 ‘붉은 악마’

조선선인 2015. 5. 6. 12:28

 

 

동이조상 치우(蚩尤)와 ‘붉은 악마’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강씨(姜氏)성을 가진 치우가 있었다”, “치우는 구여(九黎)의임금이다”했고, 상서(尙書)에는 “구여는 치우의 백성이다”고 말했다.

왕동령(王桐齡)은 ‘중국민족사’에서 “묘족(苗族)의 나라이름이 구여요, 그 임금을 치우라 했다”고 전한다. 북애자(北崖子, 조선조 숙종원년, 1675년)는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치우는 동이겨레의 한 갈레인 풍이(風夷)의 사람이다”고 했다.

그런데 중국에서 삼황오제 가운데 한 인물인 태호복(太皥伏羲)의 성이 풍씨다. 뒤 이은 소전(少典)의 후손인 염제신농(炎帝神農)은 지금의 협서성 기산현 강수(姜水= 岐水)가에서 자라난 까닭에 성을 ‘강(姜)’씨라 했다.

그가 불의 덕으로 임금이 된 까닭에 염제(炎帝, 불 임금)라고 했다.(綱鑑金丹, 中國古今地名大辭典) 또한밭 갈고 밭 메는 일 등 처음 농사법을 가르쳐 준 까닭에 그를 신농(神農, 신기한 농사꾼)이라 했다고 전한다.

‘사기’에 “강씨 성을 가진 제후인 치우가 있었다”고 했고“염제신농의 후손으로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일어났다”고 했다.(사기 ‘보사기’ 삼황본기) 염제, 황제 모두 동이족 소전의 자손이다.

산해경(山海經)에 태호복희, 염제신농, 황제헌원이 모두 숙신나라(동이겨레의 땅)에서 일어났다고 했고, ‘제계사기(帝繫史記)’에선 “황제가 밝겨레(白民)에서 났으니…자신이 동이사람이다” 했다.(黃
帝生白民…自屬東夷) 모두가 동이족에 속한다.

근세 중국학자 서욱생(徐旭生)의 ‘중국고대사적전통시대(中國古代史的傳統時代)’나 당나라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 등 역사 기록들이 치우에 대해 하나 같이 “치우가 묘족을 포함한 동이족의 임금이다”고
밝혔다. 옛적 중원천지는 우리 동이조상들의 무대였던 것이다.

중국의 역사문헌들 치우를 왜곡.

‘한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 하편, 신시역대기)’에 “신시에 도읍한 배달나라 제14세 임금이 자오지한웅(慈烏支桓雄)인데 세상에서는 치우천왕이라 하며 청구국(靑邱國)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에 151세까지 사셨다”고 전하고 있다.

“그에겐 친형제와 일가형제 81인이 있었고,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된 이마(銅頭鐵額), 모래와 돌을 씹어 삼키고 창과
칼, 큰 쇠뇌(太弩)를 만들었다. 슬기와 용맹이 남달랐으며, 능히 안개를 일으키고, 아홉 군데의 야금 소(九冶)에서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두려워했다.

치우란 우뢰와 비를 크게 일으켜 산하를 바꾼다는 뜻이다. 치우는 여산의 금속을 받아 다섯 군대(五兵)을 만들었다.”(한단고기, 司馬貞의 ‘史記索隱’, 太平御覽, 揆園史話 등) 치우로 대표되는 세력이 금속문명을 소유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헌원으로 대표되는 세력은 그때 까지만 해도 금속문명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치우는 천도에 밝았다”(‘管子’ 도행 편), “천문을 보아 중토(中土, 중국)의 왕성한 기운을 알고, 쓸데없이 죄 없는 백성을 죽일 수 없다며 돌아왔다”(‘규원사화’ 태시기).

이러한 기록을 보아서도 치우는 당시의 무기와 도술과 전략으로 헌원과 10년 동안 70여회나 싸워 모두 이겼으면서도 천도를 알고 적을 완전히 궤멸시키지 않는 포용력도 보여 주고 있다.

한데, 한국과 중국의 사서가 탁록(涿鹿)에서의 전쟁 결과를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탁록 전투에서 치우가 헌원에게 잡혀 죽었다”고 했다.

규원사화는 이를 부인한다. “이때 치우의 부장(部將)이 불행하게도 공을 서둘러 세우려 하다가 진(陣) 안에서 죽었는데 사마천이 ‘사기’에 ‘드디어 치우씨를 사로잡았다’고 한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고 했다. 부장 한사람이 진중에서 죽었는데 이를 중국 측이 곡해한 것이며 사실은 치우측이 이겼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