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방

문왕과 이윤

조선선인 2015. 10. 26. 11:44

 

 

문왕(文王)과 이윤(伊尹)의 마음가짐

글 연구위원 김성호

1. 머리말

어느 날 하루는 상제님께서 후천(後天) 음양도수(陰陽度數)를 보시기 위해 종도들에게 원하는 숫자대로 종이에 점(點)을 찍게 하셨다. 이때 황응종은 두 점을, 신경수는 세 점을, 안내성은 여덟 점을, 차경석은 열두 점을 찍었는데, 유독 문공신만은 한 점을 찍었다. 이에 대해 상제님께서 그 연유를 물으시니 그는 “건곤(乾坤)이 있을 따름이오 이곤(二坤)이 있을 수 없사오니 일음일양이 원리인줄 아나이다.”라고 아뢰었다.

공신이 이같이 대답하자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너의 말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시며 공우가 정음 정양의 도수니 그 기운을 잘 견디어 받고 정심으로 수련하라 하시고 문왕(文王)의 도수와 이윤(伊尹)의 도수가 있으니 그 도수를 맡으려면 극히 어렵다고 일러주셨다.01

과연 상제님께서는 문왕과 이윤의 어떠한 점을 천지공사에 쓰신 것일까? 게다가 그들의 도수를 맡기가 쉽지 않은 연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문왕과 이윤의 생전 행실에 근거한 그들의 마음가짐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성품과 행실 속에 드러나는 마음가짐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재조명해 본다면 아마도 상제님께서 언급하신 두 인물 사이에서 어떠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2.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이윤의 사명(使命)

이윤(伊尹)은 은나라02의 탕왕(湯王)03이 하(夏)04왕조를 멸망시키고 은(殷)왕조를 건립하는 데 있어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일등공신이자 뛰어난 명재상(名宰相)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이윤이 처음부터 탕왕의 신하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원래 은(殷)의 주왕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가장 포악무도한 폭군으로 손꼽히는 하나라 걸왕 밑에서 선관(膳官)05으로 있었던 인물이었다.06 그가 걸왕(桀王)의 신하였을 당시는 걸왕이 주변의 모든 제후국들을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걸왕은 정사(政事)는 뒷전으로 미룬 채 궁전을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주색에 빠져 악행만을 일삼았다. 그의 무도함은 도의(道義)에 어긋남을 넘어 죄 없는 백성들까지 무참히 살육(殺戮)하는 등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까지 서슴없이 자행했는데, 이로 인해 백성들은 불안에 떨며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07

이 같은 나날이 계속되자 걸의 인망(人望)은 땅에 떨어졌고, 더 이상 그를 임금으로 여기는 사람도 없었다. 백성들의 눈에 걸왕은 오직 국가의 멸망을 재촉하는 폭군이자 광인(狂人)으로 비춰질 뿐이었다.08

이때 이 같은 광경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해 걸왕에게 학정(虐政)을 자제할 것을 간언한 충신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윤(伊尹)과 관룡봉(關龍逢)09이었다. 먼저 관룡봉이 무너져 가는 나라의 장래를 염려해 걸왕에게 선대(先代)의 어진 임금들을 본받아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인애(仁愛)로써 백성을 잘 살게 해야 하늘이 천명(天命)을 거두지 않을 것이라고 간언하였다. 하지만 걸왕은 도리어 충간(忠諫)을 한 관룡봉을 참살시켰다. 이에 당시 선관의 벼슬에 있던 이윤이 죽음을 무릅쓰고 걸왕에게 또 다시 간언했다. 그는 걸왕에게 관룡봉을 참살시킨 일과 더불어 그가 정치의 상도(常道)를 어겨 천심(天心)과 민심(民心)을 잃었음을 말하고 더 이상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지 말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진언(進言)했다. 하지만 걸왕은 이윤의 간언 또한 귀담아 듣지 않았다.

걸왕 자신으로 인해 망국의 징조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음에도 걸왕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나날이 더 포악해져만 갔다. 걸왕의 이 같은 모습에 이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윤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박()10땅으로 발길을 돌렸다.

걸왕을 떠나 박 땅으로 간 그는 한동안 그곳에서 평범한 농민으로 지내며 요순의 도를 즐겼다. 당시 그는 초야에 묻혀 생활하느라 행색은 비록 남루할지라도 의가 아니고 도가 아니면 천하를 녹으로 준다 해도 돌아보지 않고, 수천 필의 말을 준다 하여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정도로 성품만은 여전히 강직했다.

한편 이런 그의 성품을 알아본 탕은 정중히 폐백을 갖추어 그를 초빙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윤은 탕의 신하가 되는 것이 요순의 도를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하여 처음에는 탕의 호의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같은 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탕은 이윤 같은 어진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수차례에 걸쳐 이윤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자 이윤도 탕의 인물됨을 알아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요순의 도를 혼자 실천하는 것보다 탕을 요순 같은 임금으로 만들고 백성들을 요순시대의 백성들로 만들 것이라는 결의를 가지고 탕왕의 신하가 되었다.

한편 그가 탕의 신하가 되었을 당시 주변의 제후들도 탕이 덕을 수양한다는 사실을 알고 걸왕을 뒤로 하고 탕에게 모여들었다. 제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탕에게 귀순하였다는 것만 보아도 당시 걸왕의 폭정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는 쉽게 짐작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헌데 이윤은 이들이 귀순하기 이전부터 걸왕의 폭정으로 인한 백성들의 아픔을 탕에게 고하고, 나아가 탕이 요순의 도(道)를 받들어 태평성대를 이룩해야 한다는 큰 계획을 상신했다. 그는 태평성대를 이룩하기 위한 방안으로 탕에게 소왕(素王)11과 구주(九主)12에 관해서 말하고 법술과 상벌로 탕을 보좌해 요순의 도를 재현시키려 했다. 탕임금 또한 그의 이 같은 점을 높이 사 그에게 우상(右相)이라는 관직을 하사했는데, 우상(右相)이 된 이후에도 그는 탕왕의 치세(治世)를 도와 탕왕이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로써 성탕은 폭정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아가 어진 정치로써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함을 깨닫고 만백성의 숙원(宿願)이었던 대업을 성취할 수 있었다.

한편 그는 탕왕이 은(殷)나라를 세우고 대업을 이룩한 뒤에도 탕왕을 뒤이은 외병(外丙)ㆍ중임(中壬) 두 왕에게서도 벼슬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탕왕 사후 그가 보좌했던 두 임금[외병ㆍ중임]은 건강상의 문제로 오래 살지 못하고 단명하였다. 이에 이윤은 대신(大臣)들과 상의하여 탕왕의 손자인 태갑(太甲)을 왕으로 즉위시켰다. 하지만 태갑제(太甲帝)가 왕좌(王座)에 오른 지 3년 만에 나라의 법도(法道)는 무너지고 정사도 나날이 어지럽게만 되어갔다. 그는 탕왕이 만들어 놓은 법도마저 없애버리고 향락에만 빠져 점점 더 포악해져만 갔다. 이대로 태갑제를 방치해 두었다가는 제 2의 걸(桀)왕이 되어 나라를 망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에 이윤은 태갑제를 탕왕(湯王)의 묘가 있는 동궁(桐宮)으로 보내 회유케 했다. 이윤이 태갑제를 동궁으로 보낸 까닭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선대임금[堯ㆍ舜ㆍ禹ㆍ湯]으로부터 지켜져 왔던 태평성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윤은 태갑제를 동궁으로 보낸 이후에도 그에게 덕치를 실현한 우(禹)왕과 폭군 걸왕의 선례를 들며 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을 훈계하였다. 하지만 태갑제는 이윤의 간언을 귀담아 듣지 않고 귀찮게만 여겼는데, 이윤은 이에 연연하지 않고 태갑제를 반드시 어진 성군(聖君)으로 만들겠다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는 태갑제가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끊임없이 찾아가 어진 임금들의 법도를 교화하고 이를 따라야 한다고 간언했다. 이같이 계속된 그의 노력으로 인해 마침내 태갑제는 동궁으로 추방된 지 3년 만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마음을 바로잡았다. 이에 이윤은 정권을 다시 태갑제에게 돌려주었고, 이윤의 간언으로 개과천선한 태갑제는 그의 훈계대로 역대 성군(聖君)들의 덕(德)을 본받아 다시 덕을 베풀고 어진정치를 행했는데, 이에 제후들은 모두 은(殷)에 복종하게 되었고 백성들도 평안하게 되었다.13

이뿐만이 아니다. 『근사록(近思錄)』14과 『소학(小學)』에 기록된 주돈이(周敦燎)15의 말을 참고하면, 이윤은 뛰어난 현자로서 자신이 보좌하던 임금이 요순의 법도와 정사대로 백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이를 자신의 탓으로 여겨 항상 자신을 책망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백성들 중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자리를 잡지 못했다면 그것까지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 마치 사람 많은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는 것과 같이 스스로를 책망했었다고 한다.16 이처럼 이윤은 매사를 남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여겨 임금을 보좌하는 재상(宰相)의 위치에서 늘 자신의 과부족을 반성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러한 그의 성품 때문인지 그가 생(生)을 마감한 뒤에도 그의 뜻을 높이 여긴 현자(賢者)들은 명재상 이윤을 들어 이윤이 뜻을 두었던 것에 뜻을 두고 흔들리지 않는 정심(正心)으로 이를 실천한다면 누구나가 현자(賢者)가 될 수 있다고까지 말하였다. 일생 동안 변치 않았던 ‘이윤의 뜻’이란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고, 위로는 임금을 도와 선대(先代) 성군(聖君)으로부터 이어져 온 태평성대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처럼 ‘요순의 도를 지키는 것에 자신의 뜻을 두고 이 일을 자신의 평생사명으로’17 여긴 이윤은 일생 동안 어떠한 난관에 봉착해도 단 한번도 자신의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오히려 이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 죽는 날까지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완수했다. 이로 인해 자신이 보좌했던 탕 임금과 태갑제는 모두 성군(聖君)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덕성(德性) 때문인지 그는 임금에서부터 백성과 신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로부터 인망(人望)을 얻을 수 있었다. 만약 이윤이 자신의 위치에서 권력과 재물만을 탐했다면 얼마든지 모든 것을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윤은 사욕(私慾)을 부리지 않고 만사(萬事)를 오직 요순의 도에 잣대를 두고 옳고 그름만을 명확하게 판단해 자신을 채찍질하여 마음부터 바로 세웠다. 그리고는 곧 이 마음을 흔들림 없는 정심(正心)으로 승화(昇華)시켜 임금과 백성에까지 이르게 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나아가 자신이 보좌하는 임금이 대업(大業)을 이룩할 수 있도록 했다.18 이러한 그의 성품을 볼 때 그가 당대인과 후대인들에게 특별히 칭송받았던 까닭은 그의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에 연유한 면도 있지만, 그보다 사실 그가 생을 마감하면서까지도 변치 않았던 ‘그의 뜻’에 더 큰 원인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3. 어지러운 난세(亂世)에 요순(堯舜)의 도를 지켜낸 성천자(聖天子)

주(周) 문왕(文王)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기장의 왕이자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后稷)19의 자손이다.20 그의 선조(先祖) 후직은 요(堯)ㆍ순(舜)ㆍ우(禹)의 시대에 미덕(美德)을 지닌 현자(賢者)로서, 당시의 백성들에게 풍요로운 수확과 자비를 베풀어 요임금으로부터 농사(農師)21로 등용된 후 후직22이라는 칭호와 함께 희씨(姬氏) 성(姓)을 하사받아 태(邰)23 땅에서 요순의 도를 따르고 백성들에게 땅의 일을 가르치며 어질게 생활했었다고 한다.24

한편 문왕의 선조(先祖) 중 후직의 증손(曾孫)인 공류[공계(公劉)]25의 대(代)에 이르러서는 하인(夏人)의 난(亂)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태 땅에서 빈 땅으로 도읍지를 옮겼다고 한다. 이로 인해 후직으로부터 대대로 지켜 온 생활터전은 잃었지만, 도읍지를 옮긴 이후에도 공류는 끊임없이 농경에 힘쓰며 백성들을 위해 어진정치를 행하며 선인(先人)들이 세운 공업을 잘 지켰다. 그 결과 농업경제도 현저하게 발전하였을 뿐 아니라, 빈 땅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누구나 할 것 없이 재물이 풍족하여 백성들로부터 한탄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26

뿐만 아니라 문왕의 선조대(先祖代)에서 공류 이후 9세가 되어 고공단보(古公亶父, 후에 태왕으로 추존)27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비록 훈육과 융적의 잦은 침입 때문에 또다시 도읍지를 빈 땅에서 기산(岐山)으로 옮겼지만, 그가 후직과 공류의 사업을 다시 익혀 덕(德)을 쌓고 의(義)를 행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받들었다.

그리고 고공단보의 아들이자 문왕의 아버지인 계력〔공계(公季)〕의 시대에는 계력이 고공단보가 남긴 법도(法道)를 잘 닦고 성실하게 의(義)를 행했으므로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순종했었다고 한다.28

계력이 죽은 후 이윽고 그의 아들 서백창(西伯昌) 즉, 문왕(文王)이 즉위했는데, 문왕 또한 후직과 공류의 사업을 따르고 고공단보와 공계[계력]의 법도를 본받아 오로지 어진 정치만을 행했다.29 그의 이 같은 면모는 지금까지도 전해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천자(聖天者)를 떠올릴 때면 요순우탕(堯舜禹湯)과 더불어 손에 꼽힐 정도이다.

하지만 문왕에게는 역대(歷代) 임금들과 대비되는 차이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그가 자신의 대(代)에서 왕으로 불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가 왕으로 불리게 된 것은 후(後)에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멸하고 주(周)나라를 창건한 뒤부터인데, 무왕이 서백을 문왕으로 추존한 까닭은 그가 폭군(暴君) 주왕의 제후국으로 있으면서도 그와는 달리 선조들로부터 이어져온 사업과 법도를 지켜 대대로 이어져온 왕업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무왕은 왕업이 계속하여 승계되어 온 까닭도 자신의 역대 어진 선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여겨 어진 선조들에게 모두 왕의 시호를 내려 추존했다.

무왕(武王)이 자신의 아버지를 문왕(文王)으로 추존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왕이 아닌 은나라의 삼공(三公)30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기〔서쪽의 기산(岐山)31〕라는 땅에서 자신의 독자적 영토을 가지고 서쪽의 모든 제후들을 관할하는 우두머리에 불과했다.32 그가 우리에게 두 호칭 즉, 문왕이라는 호칭과 더불어 서백후(西伯侯)33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편 이 당시는 하나라의 걸왕과 더불어 폭군으로 익히 알려진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紂)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당시 주왕은 달기(己)라는 미녀에 빠져서 호화로운 궁궐인 ‘녹대’를 짓고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어 장야음(長夜飮)을 즐기면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는 황음무도(荒淫無道)하였을 뿐 아니라 포락지형(烙之刑)34과 같은 잔혹한 형벌로 신하들과 백성들을 괴롭히는 폭정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주왕은 백성과 신하들에게 더 이상 지혜롭고 어진 임금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다만 그는 백성을 괴롭히는 희대의 폭군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하지만 문왕[서백후]은 주왕과는 반대로 철저하게 어진 정치를 베풀었는데, 그는 어진 사람에게는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였을 뿐 아니라 항상 늙은이를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했으며, 낮에는 현인(賢人)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느라 밥 먹는 시간까지 아까워했다고 한다.35 게다가 그는 당시 숭국(崇國)의 제후‘숭후호(崇侯虎)의 모함’36으로 유리옥에 갇혀 자신의 아들‘백읍고의 살점을 먹어야 하는 고통’37을 감내하면서도 백성들을 위해 384효를 지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후들의 도움으로 인해 주왕으로부터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에도 자신을 모함한 숭후호를 벌하기보다는 먼저 주왕의 폭정에 시달리는 신하와 백성들을 염려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주왕에게 그가 만든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켜 달라고 간언하여 이를 폐지시키기도 했다.38 이에 현인(賢人)들이 모두 서백에게 몰려들었는데, 당시 그를 칭송해 따르고자 했던 현인은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백이(伯夷)·숙제(叔齊)·대전(大顚)·굉천(天)·산의생(宜生)·육자(子)·신갑(辛甲)·태공망(太公望) 등이다.39

이처럼 문왕은 폭군 주왕이 통치하던 난세에도 결코 요순의 도와 선조들로부터 이어져 온 법도를 잊지 않고 항상 의(義)를 행하고 모든 일을 예(禮)에 합당하게 처리하여 모든 이로부터 인망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현자들과 가까이하여 정사를 토론하고 신하의 자리에는 항상 어질고 뛰어난 인재만을 선용하여 덕(德)이 있는 자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 했다.40 이 같은 문왕의 행적은 후에 『書經』에 주공41과 성왕과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이 때 주공은 성왕에게 아뢰기를 모든 일을 문왕을 본받아 행한다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4. 맺음말

지금까지 문왕과 이윤의 마음가짐을 살펴보았는데, 우리는 이 두 인물 사이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두 인물 모두 어지러운 난세(亂世)에서도 성군(聖君)들로부터 지켜져 왔던 사업과 법도를 잊지 않고 조화롭고 질서 있는 세상을 재현시키기 위해 변치 않는 마음으로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먼저 이윤은 일생 동안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고, 위로는 주군을 도와 선대(先代) 성군으로부터 이어져 온 태평성대를 지키는 것에 자신의 뜻을 두었다. 이처럼 요순의 도를 지키는 것에 뜻을 두고 이 일을 평생사명으로 여긴 이윤은 일생 동안 어떠한 난관에 봉착해도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이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이윤은 사욕에 빠지지 않고 죽는 날까지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완수했다. 이로 인해 자신이 보좌했던 탕임금과 태갑제는 모두 성군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덕성 때문인지 그는 임금에서부터 백성과 신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로부터 인망을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살았던 시국은 비록 난세였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요순의 도에 비추어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모든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늘 자신의 과부족이라 여기며 천하사에 임하는 자의 마음가짐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것이다. 그의 노력은 자신의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천하사를 위해 마음을 다잡았고, 그 마음을 임금과 백성들에게까지 미치게 하였다.

한편 이윤이 어지러운 난세에 변치않는 마음으로 천도를 지켜낸 것처럼, 문왕 또한 시대는 다르지만 주왕의 폭정에 온 백성이 신음하던 시대에 난세를 극복하고 천도를 따랐다. 그는 자신의 어진 선조인 후직과 공류의 사업을 따르고 고공단보와 공계(公季)의 법도를 본받아 오로지 어진 정치를 행하여 후에 자신의 아들 무왕이 태평성대를 실현할 수 있도록 밑거름을 닦았다. 이처럼 문왕은 선조들의 법도를 이어받아 요순시대와 같은 태평성대의 실현을 위해 일심을 가지고 부단히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어진 사람을 예로써 대하고 사람들에게 관대하여 많은 민심을 얻었을 뿐 아니라 주위로부터 인덕(人德) 있는 군주(君主)로 신망(信望)을 받아 천하 제후의 대부분이 그를 따랐다.

이처럼 중국 역사인물에서 성천자와 명재상을 꼽으라고 하면 빠지지 않고 반드시 거론되는 인물인 문왕과 이윤. 그들의 삶은 비록 가시밭길과 같이 험준하였지만, 그들이 죽음도 불사할 각오로 지키고자 한 뜻은 올바른 천도를 따른 것이기에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지 않고 지금도 세인들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진 듯하다. 상제님께서도 후천 음양도수에 관한 공사를 보시며 문공신에게 “문왕과 이윤의 도수를 맡으려면 극히 어려우리라”고 말씀하신 까닭도 문왕과 이윤처럼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굴하지 않는 마음으로 천하사에 임하여 천도를 지켜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일러주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 수도인들도 문왕과 이윤의 인물됨을 본받아 항상 가슴 깊이 새기고 일상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며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상제님을 향한 변치 않는 마음으로 수도에 정진해야 할 것이다.

01 『典經』 공사 2장 16절 참고.

02 중국의 고대왕조. 상(商)이라고도 한다. 하(夏)의 계승국가로, 창건 연도는 기원전 1760~1520년이며 몰락 시기는 기원전 1122~1030년으로 추측이 다양하다. 통치기간은 기원전 1766~1122년으로 전해진다.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COPYRIGHT(C) 동서문화, 2002)

03 기원전 18세기경에 활동한 중국의 황제. 성탕(成湯) 또는 태을(太乙)이라고도 한다. 하(夏:기원전 22~19/18세기)나라를 멸망시키고 상(商), 즉 은(殷:기원전 18~12세기)나라를 세웠다. 역사상 실제 인물인 탕은 신분이 높은 가문의 후예였던 것으로 보인다. 온후하고 관대한 왕으로 칭송받는 그는 가뭄이 들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기도 전에 비가 내렸고 탕은 목숨을 건졌다. 그는 대개 9척(2.7m) 장신, 흰 얼굴에 구레나룻을 기르고 뾰족한 머리와 6마디의 팔을 가지고 있으며 몸의 한쪽이 다른 쪽보다 훨씬 큰 모습으로 묘사된다. (『브리테니커백과사전 CD』 1999-2004)

04 중국 은나라 이전의 가장 오래된 왕조. 주(周)나라와 함께 하ㆍ은ㆍ주 3대(代)라고 병칭되고 있다. 시조(始祖) 우(愚)는 황제의 자손으로, 순제 때 중국을 휩쓴 대홍수를 다스려 순제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아 하후(夏后)가 되었다. 그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아 최초의 세습왕조가 되었다. 제 17대 걸(桀)에 이르러 덕을 베풀지 못해 제후들의 신임을 잃고 은나라 탕왕(湯王)에 의해 멸망하였다.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COPYRIGHT(C) 동서문화, 2002)

05 주방의 일을 맡아 관리하는 벼슬.

06 장기근, 『十八史略』, 명문당, 2005, p.170.

07 정범진외, 『史記』, 까치, 1994, p.50참고. / 장기근, 『十八史略』, 명문당, 2005, pp.162~168 참고.

08 이기석ㆍ백연욱, 『書經』, 홍신문화사, 1983, p.139~140참고 / 정범진 외, 『史記』, 까치, 1994, p.50 참고 / 장기근, 『十八史略』, 명문당, 2005, pp.162~168 참고.

09 하(夏)나라의 현신(賢臣), 걸이 주색에 빠져 바른 정치를 행하지 않고 악행만을 일삼기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간하다가 피살되었다.

10 중국 하남성 상병현(商兵縣) 부근. 일설에서는 이곳이 하남성 언사현(偃師縣) 서쪽지방에 있는 서박(西)을 가리킨다고 한다.

11 고대에 덕이 높아서 존경받았는데도 제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사람.

12 아홉 가지 군주의 유형을 가리키는 말. 즉, 법군(法君 :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군주), 전군(傳君 : 독단적인 군주), 수군(授君 : 다른 사람에게 전권을 위임한 군주), 노군(勞君 : 천하를 위하여 노력하는 군주), 등군(等君 : 논공행상이 공평한 군주), 기군(寄君 : 백성은 고생하는데 그 위에 교만하게 군림하여 패망이 눈 앞에 닥친 군주), 파군(破君 : 나라를 망친 군주), 고군(固君 : 성만 쌓고 덕을 쌓지 않는 군주), 삼세사군(三歲社君 : 어린나이에 즉위한 군주)을 말함.

13 이 내용은 『書經』 상서(上書)의 태갑 上ㆍ中ㆍ下편과 ‘함유일덕(咸有一德)’편에 잘 기록되어져 있다. 이를 참고하면 그가 마지막으로 보좌했던 태갑제는 젊은 시절 한 때 선왕(先王)의 법도를 어그러트리고 향락에만 빠져있었는데, 이런 그에게 이윤은 윗자리에 있는 군주나 군주를 보필하는 신하가 다함께 순정불이(純正不二), 즉 올바른 도리(요ㆍ순ㆍ우ㆍ탕의 법도를 따르는 것)를 깨닫고 이 올바른 도리에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함유일덕(咸有一德) 할 것을 태갑제에게 간언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그는 태갑제에게 임금의 덕을 행하여 종시순일 할 것을 간언하고 관직에는 오직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을 등용하고 임금의 좌우에도 그러한 사람을 둘 것을 간청했다. 만약 이러한 신하가 있다면 윗사람과 화합(和合)하여 덕(德)을 행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위할 것이라고 말하며, 이 일은 어렵고 조심해야 하는 것이니, 선대(先代) 임금들이 순일한 덕을 닦고 지킴으로써 온 세상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을 본받아 임금과 신하가 서로 화합(和合)하고 덕(德)을 순일하게 하여야 한다고 훈계했다.

14 중국 남송(南宋)의 철학자 주희(周熹)와 여조겸(呂祖謙)이 공동 편찬한 성리학 해설서. ‘근사란 자하(子夏)가 간절하게 묻고 가까이서 생각한 것’(切問近思)에서 따온 것이며, ‘인간들이 날마다 쓰는 것’(人倫日用)과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사상이다. 이 책은 송대 이학가(理學家) 주돈이(周敦)·정호(程顥)·정이(程)·장재(張載) 4명의 어록 가운데서 뽑아 편찬한 것이다. 14문(門)으로 나뉘었고 총 622조 14권으로 되어 있다. 북송 이학가들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주석서로는 송대 엽채(葉采)가 지은 『근사록집해(集解)』, 청대 강영(江永)이 지은 『근사록집주(集注)』가 있다. (『브리테니커백과사전 CD』 1999-2004)

15 중국 송(宋)나라의 유학자. 자 무숙(茂叔). 호 염계(濂溪). 도주(道州: 湖南省 道營縣) 출생. 지방관으로서 각지에서 공적을 세운 후 만년에는 루산산[廬山] 기슭의 염계서당(濂溪書堂)에 은퇴하였기 때문에 문인들이 염계선생이라 불렀다. 북송의 사마광(司馬光)·왕안석(王安石)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도가사상(道家思想)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유교이론을 창시하였다. 즉, 우주의 근원인 태극(太極:無極)으로부터 만물이 생성하는 과정을 도해(圖解)하여 ‘태극도(太極圖)’를 그리고 태극→음양(陰陽)의 이기(二氣)→오행(五行: 金·木·水·火·土의 五元素)→남녀→만물의 순서로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논하고, 인간만이 가장 우수한 존재이기 때문에, 중정(中正)·인의(仁義)의 도를 지키고 마음을 성실하게 하여 성인(聖人)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우주생성의 원리와 인간의 도덕원리는 본래 하나라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주)두산동아, 2000)

16 그의 이 같은 마음가짐은 『近思錄』과 『小學』 이외에도 『孟子』 「만장(萬章)」편 장구(章句) 上 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요순의 혜택을 입지 못한 것을 발견 하였을 때는 자신의 책임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천하를 근심하는 것이 마치 요순같았다”고 한다. ( 이기석ㆍ한용우 , 『孟子』, 홍신문화사, 1999, pp.343~344)

17 이윤의 뜻과 사명은 『書經』 상서(上書)의 태갑 上ㆍ中ㆍ下 편과 ‘함유일덕(咸有一德)’ 편의 전반적인 내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외에도 『孟子』 만장(萬章) 편 장구(章句) 下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윤은 세상이 다스려져도 나가고 어지러워져도 나가 백성들을 요순의 도, 인의의 도로 이끌어가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생각하였다.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역경에 처하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는 자신의 허물로 돌렸다. 그는 천하를 이상적인 낙토로 만드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는 강한 책임의 소유자였다. 그 때문에 맹자는 이윤을 성인 중에서 책임 있는 자로 규정지었다. (이기석·한용우, 『孟子』, 홍신문화사, 1999, p.353 참고.)

18 이윤은 의가 아니고 도가 아닌 것은 천하를 준다 하여도 받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털끝만한 것도 다른 사람에게 주지를 않았다. 그의 모든 행동은 인의의 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기석·한용우, 『孟子』, 홍신문화사, 1999, p.341)

19 주왕실의 시조로서 이름은 기(棄)이며, 후직后稷)이라는 칭호는 요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다.

20 『브리테니커백과사전 CD』 1999-2004.

21 고대의 관직이름으로 농사를 관장하는 벼슬.

22 『書經』에는 후직(后稷)의 칭호를 순임금 때 하사받은 벼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기석ㆍ백연욱, 『書經』, 홍신문화사, 1983, p.244 참고.)

23 지금의 중국 섬서성 무공현(武功縣).

24 정범진 외, 『史記』, 까치, 1994, pp.69~70 참고 / 이기석ㆍ백연욱, 『書經』, 홍신문화사, 1983, p.270 참고.

후직의 이 같은 업적은 『詩經』의 「대아(大雅)」 생민지습(生民之什) 편(篇)에서도 시(詩)로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25 공(公)은 작위(爵位), 류(劉)는 이름.

26 이기석·한용우, 『詩經』, 홍신문화사, 1984, pp.461~463 참고. / 정범진 외, 『史記』, 까치, 1994, pp. 69~70 참고. / 이기석ㆍ백연욱, 『書經』, 홍신문화사, 1983, p.270 참고.

27 고공(古公)은 호, 단보(亶父)는 자로 태왕(太王)을 가리킴.

28 정범진 외, 『史記』, 까치, 1994, pp.70~72 참고.

29 정범진 외, 『史記』, 까치, 1994, p.72.

30 천자(天子)를 보좌하여 병권(兵權)을 관장하는 최고관원. (정범진 외, 『史記』, 까치, 1994, pp.64~65.)

31 지금의 중국 섬서성 기산현 동북쪽. (정범진 외, 『史記』, 까치, 1994, p.31, p.71.)

32 정범진 외, 『史記』, 까치, 1994, p.64 참고.

33 서방 제후들의 장(長).

34 가로로 놓인 동으로 된 쇠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그 밑에서 탄으로 불을 지핀 다음, 죄인으로 하여금 맨발로 그 위를 걷게 하는 형벌이다. 쇠기둥의 온도가 높아지면 죄인은 견디지 못하고 처절한 비명과 함께 불구덩이로 떨어진다. 주임금은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이 같은 형벌을 구경하면서 즐거워하였다고 한다.

35 당시 그의 인망은 우(虞)와 예(芮)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제후국들의 제후와 만백성들에게 전해졌다.

『史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서백이 남몰래 선행을 행하므로 제후들은 모두 그에게 와서 공정한 판결을 청했다. 이때 우(虞)와 예(芮)의 사람들에게 송사가 있었는데, 양자가 해결하지 못하자 주나라 서백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들이 주나라 경내에 들어서보니 농부들은 서로 밭의 경계를 양보하고, 백성들의 풍속은 모두 연장자에게 양보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우와 예의 사람은 채 서백을 만나기도 전에 부끄러워하며 “우리처럼 싸우는 것은 주나라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바이니 가서 뭐 하겠는가? 부끄럽게만 될텐데……”라며 그냥 돌아가서 서로 양보하고 헤어졌다. (정범진 외, 『史記』, 까치, 1994, p.73)

36 숭후호는 은나라의 주에게 서백을 모함하기를 “서백이 선과 덕을 쌓으므로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기울어지니, 장차 임금께 불리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는 마침내 서백을 유리옥[지금의 중국 하남성 양음현 북쪽]에 가두었다.

37 숭후호의 말을 들은 주왕은 과연 숭후호의 말대로 문왕(文王)이 진실로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에 다음가는 현자의 품성를 지니고 있어 자신을 위협할 만한 인물인지를 시험해 보기 위해 문왕의 맏아들 백읍고(伯邑考)를 죽여 죽은 백읍고의 살을 떼어다 떡을 만들어 문왕에게 먹게 하였다. 문왕은 감옥 안에서 꿈자리가 괴이하여 점을 쳐보고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현명하다는 것이 알려지면 자신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누가 구제하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문왕은 눈물을 머금고 자기 아들의 살을 모른 체하고 받아먹었다.

38 서백이 낙하(洛河) 서쪽 땅을 바치며 주에게 포락지형(烙之刑)을 없애도록 청원하자, 주는 그것을 허락했다. (정범진외, 『史記』, 까치, 1994, p.73)

이기석ㆍ백연욱, 『書經』, 홍신문화사, 1983, p.257 참고. / 정범진 외, 『史記』, 까치, 1994, p.72 참고.

39 이기석ㆍ백연욱, 『書經』, 홍신문화사, 1983, p.257 참고. / 정범진 외, 『史記』, 까치, 1994, p.72 참고.

40 이기석ㆍ백연욱, 『書經』, 홍신문화사, 1983, p.424 참고.

41 BC 12세기에 활동한 중국의 정치가.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 주(周 : 기원전 1111경~255) 초기에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공자는 그를 후세의 중국 황제들과 대신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인물로 격찬했다. 주공은 주를 창건한 무왕(武王)의 동생으로 무왕의 권력 강화를 도왔다. 무왕이 죽자 직접 왕권을 장악하라는 주변의 유혹을 뿌리치고 대신 무왕의 어린 아들 성왕(成王)을 보좌하는 길을 택했다. (『브리테니커백과사전 CD』 1999-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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