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방

문왕과주공

조선선인 2015. 10. 26. 10:16

 

 

주(周) 무왕과 주공 - 동양적 질서의 삼위일체 (2)



문리스 (남산 강학원)



1. 무왕(武王) : 무(武)와 용(勇)

무왕(武王)은 힘과 용맹의 아이콘이다. 무왕은 선과 덕의 아이콘인 아버지 문왕(文王)이 사망한 후, 아버지의 도읍지인 풍읍땅에서 즉위했다. 곧이어 무왕은 태공망(강태공) 여상을 자신의 군사(軍師)로 삼고 아우인 주공(周公) 단(旦)을 보좌관으로 삼는다. 무왕은 또 다른 동생들인 소공(召公)과 필공(畢公)은 각각 왕을 보위하며 선대왕인 문왕의 위업을 본받게 했다. 요컨대 아버지의 사망 이후 무왕은 착실히 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무왕이 언제부터 천하를 차지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최소한 『사기』는 무왕이 문왕 사후 직후부터 군사력에 집중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무왕은 이 모든 일의 최종 이유를 아버지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정당화했다.

무왕은 즉위 9년, 무왕은 마침내 대대적인 군사 점검을 실시한다. 말이 군사 점검이지, 사실상 자신의 영향력이 닿는 모든 군대를 시험해본 것이었다. 이 훈련에서도 무왕은 아버지 문왕의 신주를 중군(中軍)의 수레에 싣고, 자신을 가리켜 태자 발(發)이라며 낮추었다. 본래 중군은 좌군과 우군을 거느리는 사령관의 자리다. 그러므로 무왕은 이러한 퍼포먼스를 통해 사실상 자신의 힘과 권력에 관한 명분을 쌓는 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은 그저 아버지 문왕의 사업을 도울 뿐이라는.

군대의 출정에 맞춰 태공망이 각 제후들에게 명령했다. “모든 장병과 선박을 출정시켜라. 나중에 도착하는 자는 참살할 것이다.”



무왕을 도와 주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태공망

이 분이야말로 낚시의 달인?



무왕이 강을 건너는데 강 중간 쯤에 이르렀을 때 흰 물고기가 날아들었다. 무왕은 몸을 굽혀 잡아 제사를 올렸다. 강을 건너자 불덩이가 하늘에서 다시 아래로 떨어지더니, 왕이 머무는 지붕에 이르러 붉은 색 까마귀로 변했다.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마치 혼백을 부르는 것 같았다.

이때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도 함께 모인 제후들이 모두 팔백명이나 되었다. 이미 천하의 대세가 기운 것. 고무된 제후들은 내친 김에 은나라 주왕을 정벌하자고 무왕에게 제안했지만, 무왕은 아직 천명이 아니라며 거절한다.

그로부터 2년 후, 은나라 주왕의 패악은 갈수록 심해져갔다. 급기야 주왕은 충신인 숙부 비간의 배를 갈라 죽이고 기자를 감금했다. 은나라의 악관(樂官)들은 악기들을 챙겨 무왕이 있는 땅으로 도망쳐왔다.

드디어 때가 왔다. 무왕은 제후들을 소집하고, 은나라를 정벌할 것을 천명했다.

“지금 은나라왕 주는 자기 부인인 달기의 말만 따르며 스스로 천명을 끊었고, 법도를 어기고 부모 형제들을 멀리하였으며, 마침내 선조의 음악을 저버리고 음란한 노래를 만들었고, 올바른 소리를 어지럽혀 사용함으로써 자기 부인을 기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 발(發)은 오직 하늘의 벌을 받들어 행하려 한다. 제후들은 분발해주시오.”

무왕은 은나라 목야(牧野) 땅에 이르렀다. 무왕은 왼손에 황색 도끼를 쥐고, 오른손에는 흰색 기를 쥐었다. 무왕이 말했다.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하는 법. 지금 은나라왕 주는 오직 여인의 말만 듣고 스스로 선조께 지내는 제사를 버려두고 지내지 않으며 나라를 혼미한 상태로 내팽개쳐버렸다. 또한 그 부모와 형제를 등용하지 않은 채 버려두고 오직 사방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사람들만 존중하고 대우하니 그자들이 오히려 백성들을 포학하게 대하고 있다. 지금 나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다. 오늘 전투에서는 힘세고 날래기가 호랑이 같고, 곰 같고, 승냥이 같고, 이무기 같아야 한다. 단, 투항하는 적은 죽이지 말라.”




은나라를 무너트리는 결정적 전투였지만,

싸우지 않고 이긴 <목야전투>


다급해진 주왕은 칠십만 군대를 내보내 무왕에 맞섰지만, 은나라 군대는 숫자만 많았을 뿐 처음부터 무왕의 군대와 싸울 마음이 없었다. 무왕이 돌격하자 주왕의 군사들은 무왕의 군대에게 길을 내주며 돌아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다급해진 주왕은 도망쳤다. 주왕은 보옥으로 장식한 옷을 뒤집어쓰고 녹대 위에서 스스로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무왕은 성으로 들어가 주가 죽은 장소에 도착했다. 무왕은 주왕의 시신을 향해 화살 세 발을 쏜 후, 마차에서 내려 시체를 검으로 시신을 벤 다음, 황색 도끼로 주왕의 머리를 잘랐다. 무왕은 주의 머리를 커다란 흰색 기에 매달았다. 무왕은 낙(洛)에 주나라 도읍을 정하고, 화산 남쪽에 말을 방목하고, 도림의 빈터에 소를 방목했다. 그리고 모든 무기를 거두어 들이고 군대를 해산시켜, 천하가 더는 무기를 쓰지 않음을 알렸다.

무왕에 이르러 주(周)나라는 마침내 천하를 얻었다. 무왕은 아버지 서백 창의 덕(德)을 바탕으로 무(武)‧용(勇)의 가치를 동아시아 통치 질서의 장에 새롭게 부각시킨 최초의 권력자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왕은 주나라를 세운지 2년여만에 죽음을 맞는다. 무왕이 병이 들었을 때, 아직 천하가 미처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대신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훗날 성왕(成王)이 도는 태자 송(誦)은 고작 아홉살이었다. 오랜 세월을 통해 마침내 이룩된 동아시아 고대의 이상적 정치체는 이렇게 또 하나의 인물을 요청하고 있었다.



2. 주공(周公) : 충(忠), 그리고 사심 없음


주나라 통치 질서의 세 번째 축이자, 이를 완성시키는 주인공은 주공(周公)이다. 주공의 캐릭터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사심(私心)없음 혹은 충심(忠心)이라고 할 수 있다. 주공은 훗날 춘추시대의 노나라 공자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중 한사람이었을 만큼 동아시아 역사 및 사상 방면에서 족적이 뚜렷하다.

주공 이야기의 큰 스토리 라인은 다음과 같다. 옛날옛날 무왕이 마침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차지한다. 하지만 무왕은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무왕을 이어 즉위한 성왕은 즉위 당시 나이가 겨우 9살에 불과했다. 이때 주공은 자신의 봉읍지인 노(魯) 땅으로 가지 않고, 아직 어린 천자(조카 성왕)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천하를 위해 정치를 돕기 시작한다. 요컨대 삼촌 정치, 즉 주공의 섭정이 시작된 셈. 훗날 동아시아(특히 조선?)에서 어린 조카와 권력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삼촌 이야기의 원형인 셈.^^



사심없음의 아이콘, 주공



하지만 주공의 순수한 열정(passion)은 권력자들의 계속되는 의심 속에서 수난(passion)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실제로 주공이 성왕의 정치를 대신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문왕의 세번째 아들이었던 관숙과 다섯번째 아들인 채숙 등은 같은 형제지간임에도 불구하고 주공을 의심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들어 쿠데타를 제압했다. 주공은 성왕 대신 정치를 대신한 지 7년이 되어 성왕이 성장하자, 정권을 성왕에게 돌려주고 자신은 신하의 자리로 돌아갔다.

과거 무왕이 병에 사경을 헤맬 때, 여러 신하들이 그저 두려워하기만 했다. 이때 주공은 스스로 볼모가 되어 제단을 설치하고, 북쪽을 향해 서서 벽옥을 머리에 이고 주나라의 세 조상신을 향해 축문을 낭독했다.

“오직 당신들의 장손 왕 발(發=무왕)이 힘들게 병과 싸우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들 세분의 선왕께서 자식을 하늘에 바쳐야 하는 책임이 있다면, 제가 왕 발의 몸값을 대신하겠습니다. 제가 기묘한 능력과 많고 많은 재능이 있어 귀신을 섬길 수 있습니다. 왕 발은 저보다 많은 재능이 없어서 귀신을 섬길 수 없습니다.”

내용을 보면 은근히 형인 무왕보다는 주공 자신을 추켜세우는 듯 하기도 하지만, 어찌됐건 살짝 형을 디스시키고 자신을 깨알 홍보하는 주공에게서 보아야할 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충심과 사심 없음의 행위야말로 주공을 주공이게 만드는 대표적 포즈의 하나다.

주공은 축문을 금색 실로 묶은 나무 궤짝에 감추어졌다. 이 대목이 그 유명한 금등지사(金藤之詞)다. 주공은 이 나무궤짝을 숨겨 놓고는, 이를 지키는 자에게 함부로 발설하지 말것을 당부시켰다. 주공의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날 무왕의 병은 거짓말처럼 나았다.(cf. 우리에겐 소설 <영원한 제국>(이인화)에서, 사도 세자의 일에 관한 영조의 본심을 밝혀놓은 글로 등장했던 적이 있다. 어찌됐건 선대왕이 남겨놓은, 하지만 봉인된 기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




금등지사!

문제는 유아인만 보인다는 것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성왕이 어려서 병이 들었을 때의 일이다. 어린 조카가 병이 나자 주공은 즉시 자기 손톱을 잘라 황하에 던지면서 신에게 이렇게 축원했다.

“왕(성왕)은 아직 어려서 식견이 없습니다. 신의 명을 어지럽힌 자는 저 단(주공)입니다.”

그러고는 축문을 장서 창고에 보관했다. 성왕의 병이 나았다. 성왕이 정치를 맡았을 때 어떤 사람이 주공을 참소하니 주공은 초나라로 달아났다. 성왕은 장서 창고를 열어, 주공의 축문을 발견하자마자 눈물을 흘리고는 주공을 돌아오게 했다. 이상의 몇 가지 일화에서 보듯, 주공은 아버지인 문왕이나 형인 무왕과는 여러 점에서 구별된다. 하지만 그 일화들의 근저에는 비록 왕이 될 운명은 아니었지만, 그는 문왕과 무왕을 잇는 삼각형의 세번째 선분으로서 그 의의가 특별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어찌됐건 이 사건으로, 오해는 풀려서 주공이 돌아왔지만, 성왕이 어른이 되어서도 정사를 처리하는 데 음란하고 방탕할까 두려워서, 즉시 ‘다사(多士)’를 짓고 ‘무일(毋逸)’을 지었다.

주공은 자기 대신 아들을 봉읍지인 노나라로 보내며 평생을 실질적으로 주나라의 사람으로 살았다. 아니 그는 뼛속 깊이 주나라 그 자체였다. 주공이 풍읍에 있을 때 병이 들어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나를 성주(成周)에 장사 지내어 내가 감히 성왕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주시오.”

주공이 죽고 나서 성왕은 주공을 필(畢)땅에 장사지내고 그곳에 매장해주었다. 아울러 성왕은 자신이 주공에 대해 군주/신하의 관계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혔다.




어린 성왕을 보필하는 주공



주공이 세상을 떠난 후 어느 해 가을, 채 곡식을 거두기도 전에 폭풍우가 몰아쳐서 벼들이 모두 쓰러지고 심지어 큰 나무까지 모조리 뽑힌 적이 있었다. 주나라 사람들은 매우 두려워했다. 이에 성왕과 대부들은 조회 때의 의복을 입고 금등서(金藤書)를 꺼내어 보았다. 니, 왕은 곧 주공이 스스로 무왕을 대신해서 죽는 것이 임무라는 말씀이었다. 태공망과 소공 및 성왕이 사관과 온갖 일을 관장하는 집사에게 물으니, 사관과 집사가 대답했다.

“분명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만 옛날에 주공께서 저에게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성왕이 책서를 부여잡고 울면서 말했다.

“지금부터 점괘에 어긋남이 없을 것인저! 옛날 주공께서 왕조를 위하여 끊임없이 애쓰셨지만, 나는 어려서 미처 알지 못하였소. 지금 하늘이 주공의 덕을 위엄 있게 밝히려 하니, 내가 그 뜻을 받들어, 내 나라의 예법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하오.”

주공의 사심 없는 충심이 죽어서까지도 주나라를 지켜주었다는 일화. 어쨌든 주나라는 왕조의 역사가 무려 800여년에 이르는, 중국 고대 왕조 역사상 가장 오랜 세월 유지된 나라였다. 또한 주나라는 고대 중국의 이상적 공동체(질서)를 상징하는 나라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훗날 국가 혹은 각종 정치체들의 성격과 관련해서 가장 동아시아적인 원형을 확인해볼 수 있다. 문왕과 무왕과 주공, 각각 덕(德)과 용(勇)과 충(忠)이라는 세 개의 기둥은 마치 하나의 솥발처럼 이렇게 서로를 기대면서 완성되었다.




'칼럼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군은 여자 신선을 가리키는 말이다  (0) 2015.11.06
문왕과 이윤  (0) 2015.10.26
문왕  (0) 2015.10.26
문닫은 유럽 교회 건물들... 옷가게·체육관·술집으로 변신  (0) 2015.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