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周) - 동양적 질서의 삼위일체
문리스 (남산 강학원)
1. 은나라 주왕은 술과 음악과 여자를 사랑했다
주(周)는 동아시아 문명사에서 국가라는 물음과 관련해 성립 조건과 작동 원리, 혹은 흥망성쇠의 공식 등을 말해주는 원초적 기호다. 잘 알다시피 주나라가 중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였던 것은 아니다. 굳이 꼽자면 주나라는 이른바 이제(二帝) 삼왕(三王) 이라 불리는 요‧순(이제)과 우‧탕‧문왕(삼왕)의 계보로 보자면 마지막 왕조에 해당된다. 요컨대 탕임금의 은나라를 이어 나라를 건국한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의 국가가 이번 주제의 주인공인 주(周)인 셈.
다른 한편 주나라는 고대 문명의 이상적 정치질서를 일단락하는 국가다. 주나라 이후 중국의 역사는 춘추전국 시대를 거쳐 진(秦)나라로 통합되었다가, 다시 한(漢)나라 등으로 이어지지만 주나라는 후대의 왕조 국가들에 대해 일종의 정치적 이데아로 기능한다. 이 배경에는 공자가 주나라를 이상적 국가로 흠모했으며, 주나라의 건국 공신인 주공(周公)을 깊이 존경했다는 점도 이유라면 이유가 될 수 있겠다.
먼저 주나라가 성립되는 배경으로부터 살펴보자. 주나라의 건국을 이야기 하려면, 앞선 왕조였던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사기』에 이렇게 둥장한다.
주제(紂帝/주왕)는 천부적으로 변별력이 있고 영리하고 민첩하며 견문이 매우 뛰어났고 힘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 맨손으로도 맹수와 싸웠다. 지혜는 간언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고, 말재주는 충분히 허물을 교묘히 감출 정도였다.
<은본기(殷本紀)>
물론 이 글 바로 뒤부터 주왕의 갖가지 패악들이 열거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역사란 승리자의 입장에서 기술된다는 한계를 감안한다면 주왕에 관한 이런 기사들은 의외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공자의 제자 자공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주왕의 바르지 못함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치가 이렇기에 군자는 하류에 머무는 것을 싫어하는 법이다. 천하의 모든 악이 그곳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논어』, <자장>)
주왕이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가 따지려는 건 아니다. 뜬금없이 패망한 마지막 군주 주왕을 옹호하고 싶어진 것도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주나라 말고도 수많은 나라들이 흥하고 또 망해왔다. 하나의 국가가 흥하고 망하는 데에는 각기 다른 저마다의 이유들이 있겠고, 그 이유들을 일률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사후적으로 평가되는 공과(功過)의 논변들에는 생각보다 말을 위한 구실일 경우들일 때가 많다. 주왕(나아가 은나라)의 수많은 결점들도 마찬가지다. 이것들은 오로지 주왕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이후 등장하는 주나라에 ‘대’하여 존재하는 서사적 장치 성격을 갖는다.
좀 짖궂게 생각해 말해보자면. 주왕은 단지 음악과 술과 여자를 사랑했을 뿐이다. 어쨌든 주왕은 악관들에게 음탕하고 퇴폐적인 곡을 지어 연주하게 하고, 들짐승과 새들을 마구 포획하고, 귀신도 우습게 알았다. 또 자신의 정원에 술로 연못을 만들고 숲처럼 고기를 달아 놓고(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성어의 유래) 벌거벗은 남녀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서로 쫓아다니며 놀았다. 은나라는 점점 세금이 가혹해지고 나라가 어수선해져갔다. 자연히 배반하는 제후도 늘고 백성들의 원망 소리가 높아져갔다. 딱 봐서 이건 은나라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주나라를 위한 기록일 뿐. 그러니 다시 한 번 글의 위력에 대해 통절하게 깨닫는 바가 생긴다.
주지육림의 아이콘, 주왕과 달기
주왕의 과도한 어긋남은 이후 등장한 주나라를 위한 장치였을 것!
2. 동양적 질서의 삼위일체 (1) - 서백 창의 복지형 리더십
은나라 말기, 기산 땅에는 서백(西伯) 창(昌)이란 인물이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 고공단보(古公亶父)로부터 터잡아 살기 시작한 기산 땅에서, 창은 후덕하고 인자한 성품을 휘날리는, 그러면서도 특히 나이 든 사람을 공경하고 어린 아이를 잘 돌보아 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자 소문을 타고 조금씩 천하의 선비들이 주왕을 떠나 서백에게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아니 정확히는 훗날 유명해지는 고죽국의 왕자 출신 백이(伯夷)와 숙제(叔弟)도 서백 창의 노인 복지 정책에 끌려 서백을 찾아간다. 서백 창이 바로 훗날 주문왕(周文王)이다.
노인복지정책(?)으로 백이+숙제를 불러모은
주 문왕!
여기서 잠깐. 서백 창이 활약하던 당시, 은나라 중앙 정부에는 미자(微子)‧비간(比干)‧기자(箕子)라는 세 명의 현자(賢者)가 있었다. 주왕의 폭정에 대한 이들의 대응은 각기 달랐는데, 먼저 주왕의 형이었던 미자(微子). 미자는 주왕을 위해 여러 번 잘못을 간언했지만 끝내 주왕이 듣지 않자 주왕을 떠나가 버린다. 도가 있으면 실천하고, 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떠나 은거한다는 스타일. 한편에선 미자가 종묘사직이 끊어질 것을 염려해 떠나갔다고 전하기도 한다.
비간과 기자는 주왕의 숙부들이었다. 이들 중 비간의 행로는 비참했다. 미자가 떠나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비간은 주왕에게 간언을 포기하지 않았던것. 하지만 그 정도로 돌아올 정신이었다면 주왕은 주왕이 아니었을 터. 숙부 비간의 계속된 잔소리에 짜증이 폭발해버린 주왕은 이렇게 말했다. ‘오! 우리 성인 같은 우리 숙부님! 일찍이 듣기로 성인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가요?’ 주왕은 비간의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보았다. 기자는 미자가 떠나고 비간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더이상 주왕에게 가능성이 없음을 알았다. 기자는 미친 행세를 하며 노비가 되었지만, 주왕은 기자를 의심해 기자를 가둔다. 듣자하니 조선(朝鮮)이라고 하는 나라에선 바로 이 기자가 미친 척 떠돌다가 동쪽 조선 땅으로 넘어와 문명을 전파했다고 하다. 믿거나 말거나.
은나라의 세 현자
미자, 비간, 기자
다시 서백 창. 천하는 점점 서백에게로 귀의했다. 돌이켜 보면 그건 일종의 대세였던 듯하다. 주왕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고, 위대한 세 현인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었으며, 백이‧숙제나 심지어 서백 자신조차도 어쩔 수 없는 무엇이었을 것이다. 서백 창의 세상이 되어간다는 것. 그것은 세상이 서백 창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과 통한다. 요컨대 『사기』의 이런 대목, 즉 서백 창의 선행이 계속되자 차츰 서백을 찾아와 판결을 원하는 이들이 늘었다는 기사가 그렇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우(虞)땅과 예(芮)땅 사람들 사이에 소송이 발생했는데 해결이 나지 않아 서백을 찾아왔던 것. 그들은 서백의 땅으로 들어서자마자 밭가는 사람은 밭의 경계를 양보하고, 나이가 더 많은 사람에게 양보하는 풍습을 보았다. 우와 예 사람들은 서백을 찾아와 만나기도 전에 부끄러워하며 자신들에겐 다툼을 일으키는 문제가 서백 땅 사람들에겐 서로 부끄러워하는 일에 지나지 않음에 감탄하며 돌아갔다.
다른 한편 서백은 견융족을 정벌하고, 밀수(密須)를 정벌했으며, 기국(耆國)을 물리쳤으며, 우(邘)를 정벌했다. 또 서백은 과거에 자신을 모함한 숭후호를 정벌하기도 했지만, 끝내 직접 주왕을 향해 자신의 힘이나 권력을 직접 행사하지는 않았다. 살아생전 서백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천명을 받은 군주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미 은나라의 3분의 2가 서백에게 귀의한 상태였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서백은 그저 자신의 덕을 닦고, 선을 실천했을 뿐이다. 서백은 타인에게 나아가 타인을 직접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던 자기 실천으로서의 군주의 덕을 보여준다. 그가 유리에서 『주역』의 64괘를 만들고, 훗날 자신의 봉토에서 은나라의 법을 고쳐 새로 달력을 만들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선을 행하고 덕을 베푸는 일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문왕, 실제로 왕위에 오른 적은 없다.
'단지' 덕을 닦고 선을 행한 것만으로,
천하가 스스로 머리를 숙였다는 것.
서백 창은 실제로 왕이 되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문왕(文王)이 되었는가. 일차적으로는 그의 아들 무왕(武王) 발(發)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건국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왕이니 아버지도 왕이 될 수밖에. 하지만 서백 창, 아니 주문왕은 성인(聖人)인 동시에 왕이었다. 명목상 왕이라 불리지 않았을 뿐, 문왕은 은나라 말기 실질적인 천하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주(周)나라를 이루는 세 개의 축 가운데 한 가지는 이렇게 준비되었다. 그것은 바로 왕 아닌 왕이다. 덕과 예를 실천하는 도덕적 왕의 풍모랄까. 물론 이제 겨우 주(周)라는 솥(鼎)의 다리 한 쪽을 찾아냈을 뿐이다. 솥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아직 두 개의 다리를 더 찾아야한다. 무왕(武王)이라는 군사적 용맹의 아이콘과 주공(周公)이라는 사심없는 충성의 아이콘의 등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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