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무아 - 5온 은 내가 아니다 고정된 나는 없다
무상 -변하지 않는것은 없고 , 고- 변하니 괴롭고 ,무아인- 변하니 고정된 나는 없다 여기서 나는 참나가 아니다
밑에 내용 가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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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다른 종교처럼 덮어놓고 믿으라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이것이 불교의 매력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부처이고 너희들의 스승이라고 해서 내가 하는 말을 그냥 믿지 말라.
너희 스스로 철저하게 분석하고 따져보아라.
마치 금을 가공하는 사람이 이게 금인지, 금 비슷한 금속인지, 모래인지를 구분하는 것처럼...."
자기가 직접 체득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 외는 사실 불필요하고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
무상 고 무아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 스스로 이해하고 깨달아야만 한다.
무상 고 무아를 믿어봐야 소용없다.
모른 채 믿어봐야 믿는 것도 아니다. 믿는 척만 할 뿐...
그러므로 그렇게 믿어봐야 집착은 전혀 사라지지 않게 된다.
덮어놓고 믿는 그런 헛된 믿음은 사실 불필요하다.
앎, 이해, 깨달음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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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無常)
무상이란 항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항상이란 영원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상이란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다.
또한 변화한다는 의미다.
변화하여 사라지고 소멸된다는 뜻이다.
즉 변하고 사라지고 소멸된다는 의미가 무상이다.
영원하지 않다.
범부중생들은 무상함을 모른다.
모든게 영원한 줄 안다. 그래서 집착한다.
그래서 수행의 첫번째가 바로 이 무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정말로 모든게 변화하는지, 그걸 본인이 직접 관찰해야만 한다.
그리고 깨달아야 한다.
모든게 변화한다는 사실을....
첫째로는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관찰해야 하고,
둘째로는 나 이외의 모든 것들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관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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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無常) --> 고(苦)
무상을 관찰하기만 하면 안된다.
무상함을 관찰하고 나서는 그 무상함이 곧 괴로움임을 깨달아야 한다.
무상함이 곧 고통이며 괴로움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고 이해해야 한다.
무상함이 곧 괴로움임을 알고 이해하는게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야 집착을 놓기 때문이다.
무상함만을 알고 그 무상함이 괴로움임을 모른다면 갈애/집착을 버릴 수가 없다.
영원하지 않는 것은 괴로움이다.
변화한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변화하다가 사라지고 소멸되는 것은 괴로움이다.
중생들이 가장 집착하는 건 바로 자신의 몸이다.
몸이 영원한 줄 아니까 집착한다.
그래서 다 늙어서 추한 몸이건만 집착을 놓지 못해서 죽을 때, 즉 몸을 잃을 때 큰 고통이 된다.
단 한번이라도 이 몸은 변화하며, 그러므로 이 몸은 고통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면
죽어서 이 몸을 잃어버릴 때 마음만큼은 전혀 괴롭지 않을 것이다.
이 몸이 모든 고통의 주범임을 안다면,
죽을 때 더러운 똥 버리듯이 버리고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스스로 집착을 버리게함으로써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모든게 항상 변해간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범부중생들은 모든게 다 변화한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변화 즉 무상함이 곧 고통임을 알지 못한다. 그저 고통속에서 허우적 거릴 뿐이다.
내 착각이 고통을 불러온다.
내가 모든게 영원할 것이라고 믿으니까 집착하고, 그 집착이 곧 고통을 불러오게 된다.
자업자득이다.
내가 날 괴롭하는 것이지, 남이 날 괴롭히는게 아니다. 내가 내 고통의 주범이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모든게 다 변화하여 사라진다는 무상함을 스스로 관찰하고,
그 무상함이 곧 괴로움임을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
무상함이 곧 괴로움의 원인이다.
무상함이 곧 괴로움임을 알아야 집착/갈애를 스스로 버리게 된다.
여지껏 즐거움인줄 알고 집착했으나,
그게 아니고 무상함이 괴로움의 원인임을 알기에 스스로 집착을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무상함이 곧 괴로움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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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我)
우선 나(我)라는 개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나(我)라는 것은 영원성을 상징한다.
항상함, 영원함, 변하지 않음 그것이 곧 나(我)이다.
변하는 걸 나(我)라고 부르는게 아니다.
그러므로 나(我)라는 것은
어떤 독립적인 실체를 가진 영원성의 개체를 뜻한다.
중생들은 어릴 적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다고 여긴다.
이렇듯 나라는 것은 변화없이 영원함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나라는 것은 즐거움을 의미한다.
항상 변화하지 않기에 그걸 즐거움으로 안다.
그래서 <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나>라는 것의 의미는
첫째 변화하지 않고 영원함을 의미하며,
둘째 즐거움을 뜻한다.
물론 이것은 어리석은 범부중생들의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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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
왜 무아인가?
무상하며 고이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다.
진짜 나(我)라면
변화가 없어야 하고 항상하기에 즐거움이여야만 한다.
그러나 잘 관찰해보니 그렇던가?
그렇지 않더란 얘기다.
모든게 다 변화한다.
내 몸도 변하고,
내 마음도 항상 변해가고,
주변 사람과 주변 사물들 그 모든게 다 변화해간다.
그토록 믿었던 애인/마누라/남편이 바람나서 얼마나 괴로웠던가?
근데 이건 그 누구나 다 겪는 일이다. 모두가 다 겪는 일이다.
중생은 특히나 내 몸을 나로 여기는데,
내 몸은 변화한다. 즉 늙어간다.
내 몸이 진짜 나라면 내 뜻대로 되어야 하고 늙지 말아야 한다.
내가 내 몸의 주인이라면 내 몸이 내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질 못하다.
몸에게 늙지 말라고 명령하면 늙지 않던가?
병걸린 몸에게 병아 지금 당장 나아라 라고 명령하면 몸이 그 명령을 따르던가?
생각 또한 내 뜻대로 되던가?
그렇지 않다.
바다야, 쩍 갈라져라..라고 생각해봐야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으로 여기는게 바로 마음 속의 생각인데,
이 생각조차 언제나 변화해간다.
다만 이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그 생각을 영원한 나로 여기는데
이게 멍청한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걸 나로 여기는 것이니까!
몸과 마음 이외에 즉 오온 이외에 나라는 것은 없다.
즉 중생들이 나라고 여기는 것은 오온이다.
몸과 마음 이외에 나라고 여기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몸을 때리면 괴로워하고,
몸을 잘 치장해서 이뻐지고 멋있게 보이려고 노력한다.
몸을 나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또 마음을 나로 여기기에 온갖 마음의 상처를 잘 입는다.
그래서 온갖 정신질환을 거의 모두가 다 겪고 있다.
중생 자체는 바로 탐진치에 찌들어 있고, 무명이라는 정신병에 걸려 있는 존재들이다.
몸과 마음 이외에 제3의 독립적인 어떤 실체가 있다면 그게 또 나와는 무슨 상관이던가?
몸이 아프던, 마음이 상하던 간에 그건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치는데...
중생들이 실제 나라고 여기는 것은 오온인 몸과 마음이다.
그 몸과 마음이 변화하므로 거기에는 나라는게 없어서 무아(無我)이다.
몸과 마음은 항상하지 않고 변화하므로 고통이다.
나라는 건 항상하고 즐거움인데,
그 몸과 마음은 변화하고 고로움 그 자체이니 몸과 마음엔 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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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사람들이 무상함을 알까?
모든게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알까?
그렇지 않다.
변화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안다면 집착하지 않게 된다.
모르니까 집착한다.
변화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에 온갖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 무상함...변화.
왜 그런 뻔한 얘기를 하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아는 듯이..
그러나 전혀 모르고 있고, 다만 아는 척만 할 뿐이다.
4전도가 있다.
네가지 전도몽상. 즉 상락아정이다.
중생들의 네가지 착각을 의미한다. 물론 부처님의 말씀이다.
상 : 항상 변화해 가는데 모든게 영원한 줄 착각하고 있다.
락 : 괴로움인데 즐거움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아 : 나라는게 없는데 나라는게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정 : 더러운데 깨끗한 줄 착각하고 있다.
이 상락아정은 열반사덕이라고 알기 이전에 4전도임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런 것도 모른채 열반사덕만 따지다가 삿되게 잘못 이해한 자들이 부지기수이다.
범부 중생은 모든게 변화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를 관찰해야 한다.
수행의 첫번째가 그래서 무상함을 관찰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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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我)라는 것은 그럼 뭔가? 이 세상에서의 쓰임새
나라는 것은
지칭하는 단어, 글자일 뿐이다.
우리 인간세계에서 인간들끼리 나와 너를 구분하기 위해서 부르는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이러하게 생기고 이러이러한 마음을 쓰는게 바로 나다...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몸과 마음엔 나라는게 없다.
다만 말과 언어로써 나라는 용어가 사용될 뿐이다.
몸과 마음엔 나라는게 없으나,
인간세계에서 너와 나를 구분해서 알기 위해서 쓰이는 용어게 바로 <나> 그리고 <너>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용어, 호칭, 명칭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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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도 나라는 용어를 많이 쓰셨다.
또 모든 경전의 첫머리에는 여시아문, 즉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고 쓴다.
무아인데,
본래 나라는 건 없는 것인데,
왜 부처님께서도 나라고 하셨으며 또 모든 경전의 첫머리엔 왜 또 나라는 용어가 나오는가?
그건 세속법을 따랐기 때문이다.
본래 나라는 건 없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속법을 따랐기에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중생들의 입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어차피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에게 설법하시므로 중생들에게 맞출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경전도 또한 중생들이 읽어야 하는 것이므로 중생이 사는 세속법에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도 나라는 용어를 쓰셨고, 경전에도 여시아문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가 나라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허물될 것은 전혀 없다.
경전에 나오는 여시아문도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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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에서의 行은 움직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움직임/변화는 결국 영원하지 않기에 <제행무상>이다.
움직임/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이 현실세계에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은 변화해 간다.
변화해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발생 자체가 인연화합 즉 연기법으로 인해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변화해가고,
그 변화란 곧 잃어버림의 고통을 가져오므로 <일체개고>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에는 영원함을 지닌 실체가 없기에 <제법무아>이다.
나라는 게 본래 없기에 무아지, 나라는 걸 없애서 무아가 아니다.
제법이 본래 무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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