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李祥昊, 1880~1967)는 호를 청음(靑陰)이라고 하며, 1880년 조선 전라도 해남군[1] 삼산면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26세에 중국을 유람하다 1906년 귀국하여 1907년 28세에 증산교 파맥 계파의 선도교(仙道敎)에 입교한다. 뒤에 선도교를 차경석이 접수하고 본격적으로 보천교로 창교하자, 1919년[2] 중앙 최고 8교령(敎領)의 한 명으로 임명되었으며, 보천교경성진정원장(普天敎京成眞正院長)과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의 경영을 맡는 등 최고위급 인사로 활동하였다.
1926년 보천교 경성진정원 원장 직함이라는 종파 교직을 파면당하고, 동시에 보천교 종단정화위원회 위원장 직함으로 강등되자[3] 동료 간부였던 이종익(李鍾翊[4]), 동생 이정립(李正立[5]) 등과 함께 경성(서울)에서 보천교 혁신 운동 등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1928년에 차경석이 점점 혹세무민으로 가는 것을 보고 이상호·이정립 형제 둘은 보천교의 구성원에서 탈퇴한다. [6] 이상호는 임경호(林警鎬), 이정립 등과 함께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용화동에서 동화교(東華敎)라는 이름의 종교를 창립하였다. 그 뒤, 이상호는 생전에 도조(道祖)였던 증산 강일순(1871~1909)의 생전 행적과 언행을 어록이라는 자료로써 수집하여, 1929년에는 대순전경(大巡典經)이라는 증산교단 최초의 교전들을 간행하는 업적을 세웠다.
1931년 동화교는 고판례(高判禮)의 선도교(仙道敎)와 통합하였으나, 1937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증산계 모든 종단의 해산 명령이 내려짐에 따라 해체되고 말았다.